[와인,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미국 와인의 이해 ① 미국의 와인산업 1부

미국의 와인산업
미국인들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선호하는 편으로서, 미국인들이 소비하는 모든 와인의 4분의 3 이상이 미국산이다. 미국 50개 주 전역에서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미국의 초창기 와인
순례자들과 초기 개척자들은 미국에 도착하고 얼마 후부터 식사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황무지에서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뻐했다. 검소하고 자립적이던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품종들(주로 비티스 라브루스카 Vitis labrusca)을 보고는 직접 와인을 만들 수 있겠다고, 비싼 유럽산 와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생종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를 수확한 뒤 최초의 미국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빈티지의 풍미는 유럽의 포도를 빚은 와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결국 유럽에서 비티스 비니페라 Vitis vinifera 종 포도나무의 가지를 주문하면서, 수백 년 전부터 세계 최상급 와인을 만드는 데 쓰여온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를 들여오게 되었다.
그들이 정성 들여 재배했음에도 제대로 자란 유럽산 포도나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포도나무가 시들시들하다 죽어버리고, 살아남은 나무도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하였다. 그나마 얻은 빈약한 수확량으로 애써 와인을 만들어보았으나 그 품질은 아주 형편없었다. 그들이 들여온 유럽의 포도나무들이 신대륙의 식물병과 해충에 대한 면역성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북동부 및 중서부의 재배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자, 다시 북아메리카 자생 포도나무인 비티스 라부르스카를 심음으로써 소규모 와인산업을 겨우겨우 이어나갔다. 결국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 와인이 선호되었다.
미국에 와인산업을 정착시키려는 초창기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수입 와인의 비싼 가격까지 더해지면서 와인 수요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 후 미국인의 취향은 점차 바뀌어 식사에 와인이 같이 나오는 경우는 몇몇 특별한 날로 제한되었고, 대신에 그들의 식탁에는 맥주와 위스키가 차지하게 되었다.
와인이 서부에 들어온 시기와 경위
서부의 와인 생산은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 스페인 정착자들이 멕시코에서 북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부터 가톨릭교가 같이 따라왔고 선교관의 시대도 시작되었다. 초창기 선교회는 단순한 교회 이상으로, 남서부와 태평양 연안에서의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급자족적 방어시설로 여겨지던 공동체였다. 이들 초창기 정착자들은 스스로 식량과 옷을 구하고 만들었을 뿐 아니라, 와인도 직접 주조하였는데 와인은 주로 교회에서 쓰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의 교회 의식에서 성찬식 와인은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와인에 대한 수요가 늘자 비티스 비니페라 종 포도나무를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들여왔다. 캘리포니아에서 이 포도나무는 온화한 기후 덕분에 잘 자라났다. 이로써 소규모이긴 했으나 진정한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이 자리 잡았다.
1800년대 중반에는 양질의 와인 생산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가 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 사건은 1849년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였다. 골드러시에 이끌려 유럽과 동해안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와인 양조 전통도 함께 가져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였고, 이내 양질의 상업용 와인을 생산해냈다.
두 번째 중대 사건은 1861년에 일어났다.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경제성장에 대한 포도 재배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유럽에서 비티스 비니페라 종 중 리슬링, 진판델,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같은 대표적인 포도나무의 가지를 선별하여 수입해오라고 했다. 이 품종들은 잘 자랐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와인을 생산해내면서 캘리포니아의 와인 양조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필록세라의 발병, 황폐해진 포도밭
1863년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은 번창하는 반면 유럽의 포도원들은 곤경에 빠졌다. 미국의 동해안이 원산지로 포도 작물에 치명타를 입히는 해충 필록세라 phylloxera가 유럽의 포도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록세라는 실험 목적으로 수출된 미국 자생 포도나무들의 가지에 붙어 들어온 것이었는데 포도나무의 성장에 파괴적이었다. 그 후 20년에 걸쳐 필록세라가 야기한 피해는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유럽의 포도밭을 황폐화시키면서 유럽의 와인 생산이 대폭 감소했다. 그것도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던 시기에 말이다.
결국 캘리포니아가 세계에서 유럽종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는 유일한 지역이 되면서 와인 수요가 치솟았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와인의 대규모 시장 두 개가 육성되어야 했다. 그 하나는 저렴하면서도 마실 만한 좋은 와인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더욱 고품질의 와인을 구비한 시장이었다.
1876년에 이르자 캘리포니아는 매년 870만 리터 이상의 와인을 생산했다. 그중에는 주목할 만한 품질의 와인도 더러 있었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는 세계 와인 양조의 새로운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해에 필록세라가 캘리포니아에 들이닥쳤다. 필록세라는 유럽에서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수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죽어나가면서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은 재정적 파탄을 맞았다. 필록세라 병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파멸적인 작물병으로 남아 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주들에서는 라브루스카 종 포도로 만든 와인을 계속 생산해냈고, 덕분에 미국의 와인 생산이 전면 중단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유럽의 와인 메이커들은 수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치명적인 필록세라에 대한 방제책을 찾아냈다. 비티스 비니페라 종 포도나무를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라브루스카 종 포도나무의 접본에 접붙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와인산업을 구한 것이다.
미국인들도 그들의 선례를 따르면서, 이제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 더 좋은 품질의 와인을 생산해내고 있다. 1800년대 말경 캘리포니아 와인은 국제적인 경쟁에서 상을 획득하면서 세계의 관심과 감탄을 자아냈다.
금주법, 또 한 번의 역경
1920년 미국의 수정헌법 제18조가 제정되어 미국 와인산업에 또 한차례 역경이 닥쳤다. 전국 금주법 National Prohibition Act, 일명 볼스테드 법 Volstead Act(제안자인 하원 의원의 이름을 딴 것임)이라는 법이 발효되면서 음주 목적으로는 주류를 제조, 판매, 운송, 수입, 수출, 배달,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13년간이나 시행된 이 금주법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번성해가던 산업이 거의 파탄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볼스테드 법의 허점 가운데 하나는 예외 규정이었다. 성찬용 와인의 제조 및 판매는 허용되었으며, 의사의 처방만 받으면 의료용으로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고, 강장제용 와인(주정강화 와인)은 처방전 없이도 구입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치명적인 허점이라면, 과일즙이나 사과 즙은 누구나 매년 약 750 리터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이었을지 모른다.
사실, 과일즙은 더러 농축액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와인 양조용으로는 이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포도 농축액을 구입해 동해안 지역으로 수송하곤 했다. 그때 컨테이너 위에는 크고 굵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주의! 당분이나 효모, 기타 발효를 일으킬 만한 것은 뭐든 첨가를 금함." 이 중 일부가 미국 전역의 밀조자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밀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가 개입하여 포도즙 판매를 금지하면서 불법적인 와인 생산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결국 포도원들은 포도 재배를 그만두었고, 이로써 미국의 와인산업은 중지되고 말았다.
한편 강화 와인, 즉 의료용 강장 와인은 알코올 함량 20% 정도로 보통 와인보다 증류주에 더 가까웠고, 금주법 시행 중에서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와인이 되었다. 미국의 와인이 빠르게 대중화된 데는 그 맛보다는 효과가 큰 몫을 했다. 사실, 와이노 wino(와인 중독자)라는 말도 대공황 중에 생겨난 것으로 시름을 덜기 위해 강화 와인에 기대었던 불운한 사람들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금주법은 1933년에 폐지되었으나, 그 영향은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금주법 폐지 무렵 미국인들은 양질의 와인에 대하여 관심을 잃고 있었다. 금지법 시행 동안에 전국에서 수천 에이커 상당의 우수한 포도나무들이 갈아엎어졌다. 전국 곳곳의 와이너리들이 폐업하면서 와인 양조산업이 쇠하였으며, 버티고 살아남은 곳은 주로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소재한 소수에 불과했다. 동해안 재배자 대부분은 포도주스 생산 쪽으로 돌아섰다. 사실, 미국의 라브루스카 종은 포도주스용으로 이상적이다.
1933년부터 1968년까지 포도 재배자들과 와인 메이커들은 양질의 와인을 생산해낼 동기가 없었다. 그래서 와인은 그저 항아리형(jug) 병에 담아 값싸고 별 특징 없는 '저그 와인'을 대량 생산했다. 더러 몇몇 와이너리에서, 특히 캘리포니아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양질의 와인을 생산하기도 했으나 이 시기에 생산된 미국 와인은 대부분 별 특징이 없었다.
금주법으로 미국의 와인 생산자 대다수가 타격을 입었으나 성찬용 와인을 만들며 버텨낸 곳들도 있다. 베린저 Beringer, 보리우 Beaulieu, 크리스천 브라더스 Christian Brothers가 금주법 시행기를 용케 견뎌낸 소수의 와이너리다. 아 와이너리들은 금주법이 시행되는 동안에도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곳들보다 유리했다.
연방정부는 금주법을 폐지하면서 알코올 판매와 운송에 대한 권한을 주정부에 일임했다. 그런데 몇몇 주는 그 통제권을 카운티, 더러는 심지어 시당국에 넘겨주었다. 이 방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시 혹은 카운티마다 통제권 보유처가 다른 것이다.